시조 인가공 휘 총 존영(始祖 引駕公 諱 㹅 尊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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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金㹅 주1)은 역사적 기록물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주2)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주3)를 종합하면 후삼국(後三國)시대의 현인(顯人)이오 호걸(豪傑)이다. 벼슬은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다. 남겨진 존영(尊影)이 없음으로 부득이 존영을 대신한 영상(影像)이다.
근거(根據)는 오른쪽 상단(上壇)에 성황신김장군(城隍神金將軍)이라는 묵서(墨書)다. 이 묵서는 이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김장군 휘총 기적현령활인(金將軍諱㹅奇蹟顯靈活人)’이란 전설적(傳說的) 인물(人物)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高麗) 초 왕건(王建)의 지시로 진례산(進禮山, 지금 錦山의 옛이름)의 안관사(安官詞)에서 제향(祭享)했으며 고려 후기(後期)에는 인제산신(麟蹄山神) 박란봉(朴蘭鳳주4)을 추향(追享)하고 또 조선(朝鮮)의 인조조(仁祖朝) 丁卯(1627)년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추향하고 나라에서 향사를 올렸다는 설을 받아드리고자 한다.
1988년 순천김씨대종회(順天金氏大宗會)에서는 동원재(同源齋)에 영당(影堂)을 꾸미고 봉안(奉安)한 다음 문화재(文化財)지정신청을 한 결과 전라남도(全羅南道) 문화재 심의(審議)위원회에서는 ‘성황신 김총 영정(城隍神 金㹅影幀)’ 이라는 명칭으로 전라남도 문화제 민속자료(民俗資料) 第27號(순천시)로 지정하고, 유물(唯物) ․ 고회화(古繪畵) ․ 무속화(巫俗畵)로 분류하였다(1988년 12월 21일).
즉 성황신은 중국(中國)으로부터 유입(流入)된 성황신앙의 대상으로 마을 수호신(守護神)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모시긴 했으나 성황신의 신체(神體)가 머무는 곳인 성황당(城隍堂)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마을의 안정(安定)과 풍요(豊饒)를 기원(祈願)하였다.
이상의 정황(情況)을 살펴보면 회화(繪畵) 그 자체를 순천김씨 시조(始祖)의 영정(影幀)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이 회화의 오른 쪽 상단(上壇)에 성황신김장군「城隍神金將軍」이라는 묵서에 의미를 부여하면 바로 그 시절(時節)의 숭앙(崇仰)의 대상으로 김총의 인품(人品)과 활인전설(活人傳說)은 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서의 숭앙대상에 손색(遜色)이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성황신은 대체적으로 마을 수호에 공(貢)이 큰 인물을 신격화(神格化)하여 섬기는 경우가 많은데 김총장군이 역시 순천의 고을 신(神)으로 모셔졌던 것이리라~
다만 조선 중엽(中葉)에 이르자 으뜸가는 한 인물의 표상(表象)을 한 무당(巫堂)이 활용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주1. 金㹅 :총의 한자표기 [㹅]은 [摠]의 譌字 또는 俗字이다 그런대 甲申初譜(1764,영조40년)와 丁巳譜(1857, 철종 8년)에는 [㹅]이나 丁卯譜(1927)부터는 [摠]을 썼다. 승람(勝覽)에는 [㹅]자로 기록했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摠]자로 수정됨 그래서인지 丁卯譜)에는 [摠]자로 표기함. 이후 丁酉譜(1957) 甲子譜(1984) 甲午譜(2014) 모두 [摠]자로 기록함. 혹 [惣]자로 기록한 곳이 있는데 역시 [摠] 또는 [揔]의 譌字이나 어떤옥편에는 '괴로울 또는 바뿔'총으로 뜻이 다르게 서술된 경우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이나 자나 조선후기부터는 시조의 휘자를 마구 자기편리한대로 사용한 것 같다. 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해서 시조의 휘까지 마구 기록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더구나 정묘보는 일제강점기였음으로 마구 취급한 것 같아 불신이 앞선다. 고의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너닷없이 헌안왕시대의 인가별감으로 수단을 꾸며놓았다. 물론 정유보에서 다시 수정되었지만 당시의 편찬위원의 양심이 의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명에는 획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半字를 쓰는 경우도 있기에 俗子이지만 앞으로는 최초로 사서(승람)에 오른 [㹅]자를 그대로 쓰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惺雲斗熙 提)
주2. 승람 권40 의 후백제인물조에 [金㹅 仕甄萱 官至引駕別監死後爲府城隍神(국역; 김총은 견훤에 벼슬하여 인가별감에 이르고 사후에는 부의 성황신이 되었다.] 라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즉 [승람]은 조선(朝鮮) 건국 후 통치상의 필요에서 지리지(地理志) 편찬의 중요성을 통감한 세종(世宗)의 명에 따라 맹사성(孟思誠)․신색(申檣) 등이 1432년(세종 14)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 1477년(성종 8)에 《동문선》에 실린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詩文)을 첨가하고, 체제는 남송(南宋)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明)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들어오자, 양성지(梁誠之)․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居正) 등이 성종(成宗)의 명으로 이 체제를 본 따서《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를 다시 1486년에 증산(增刪)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55권을 간행하고,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1478-1534)이 수찬당상이되고 ․홍언필(洪彦弼, 1476-1549)과의 증보(增補)에 의해 이 책의 완성(完成)을 보게 되었다. 책머리에 이행․노사신(盧思愼)의 진전문과 서거정(徐居正)의 서문(序文)이 있고, 책 끝에 홍언필(洪彦弼)․임사홍(任士洪)․김종직(金宗直)의 발문이 있다. 그런데 1906년(광무 10) 일본인 후치카미[淵上貞助]가 서울에서 활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12년에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역시 활판으로 간행하였고, 1958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주3. [문헌비고] : 순천김씨 始祖摠 :[本新羅宗姓弓裔時爲引駕別監 移籍順天封平陽君死爲本府城隍神(국역; 원래 신라종성으로 궁에시인가별감이었다가 순천으로 이적하고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사후 본부의 성황신이 됨)] 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초 편찬은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堂上과 郎廳 각 9명)이 왕명을 받아 9개월 만에 상위(象緯)·여지(輿地)·예(禮)·악(樂)·병(兵)·형(刑)·전부(田賦)·재용(財用)·호구(戶口)·시적(市糴)·선거(選擧)·학교(學校)·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 40책의《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인쇄 완료 하였다. 그러나 급조하는 바람에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년(正祖 6) 왕명으로 이만운 (李萬運) 등에게 이를 바로잡아 보편(補編)토록 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며, 9년여에 걸쳐 《동국문헌비고》의 13고(考)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우는 한편 새로이 물이(物異)·궁실(宮室)·왕계(王系)·씨족(氏族)·조빙(朝聘)·시호(諡號)·예문(藝文)의 7 고(考)를 증보하여 계 20고(考)를 146권으로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곧 교열하지 못하고 순조 7년(1807)에 이 만운의 아들 유학(幼學) 이유준(李儒準)으로 하여금 교열하게 하여 9년(1809)에 완료하였으나 출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이를 많이 등사하였다 한다. 그 후 100여 년 뒤인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에 이르러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을 하였다. 즉, 1903년(광무 7)에 김석규(金錫圭)의 건의에 의하여 특별히 문헌비고찬집소(文獻備考纂輯所)를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들(당상 낭청 각 10명)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하여 광무 11년(1907) 12월에 현재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50권을 편찬하고 다음해 융희 2년(1908)에 이것을 인쇄하여 50책으로 장정(裝幀)한 것이다.
박용대 등은 5년여에 걸쳐 《증정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 중에서 물이는 상위에, 궁실은 여지(輿地)에, 시호(諡號)는 직관에 포함시키고, 왕계(王系)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다. 또 조빙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여지·제계·예·악·병·형·전부·재용·호구·시적·교빙·선거·학교·직관·예문의 16고 250권으로 편성하여 간행하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제도·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주4. 박란봉은 순천박 씨 종중에서는 정승공이라 전해 내려온다. 즉 정승이라는 관직은 『고려백관지』에 따르면 정승은 원나라 관직을 본받은 고려후기의 관직이다.
소재지 : 순천(順天)시 주암(住岩)면 주암(住岩)리 오성(五星)산하 시조영당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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