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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序文 서운 두희(惺雲 斗熙)

序文 又 갈산 동훈(葛山 東壎)

序文 又 소암 철희(昭菴 喆熙)





序文 두희


바른 길 바른 줄기

이 전자세계는 미래를 위해 구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제 정보기술(IT, Information Technology,)의 발전으로 인하여 제3차 산업형명시대에 들어있으며 곧 인공지능의 발전에 의하여 제4차 산업혁명에 돌입 준비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위작(僞作)이나 가작(假作)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모를 경우 사실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논법에 따라 미리 가설(假說)은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찾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언젠가는 입증이 가능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 가설은 맞을 수도 있고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잃었던 옛 근간(根幹) 찾기에 지나치게 얽매이거나 못 찾았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급하게 서둘 필요도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이미 계보(系譜)가 뚜렷한 문중도 있는데 왜 우리 김 씨만이 뚜렷하지 않았겠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신라왕손인 우리 김 씨 조상이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조상님들이 지켜온 길을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의문(疑問)을 풀어가며 그 바른 길을 찾아 조상의 훈업(勳業)을 지켜가며 또 우리 후손들이 손쉽게 자기개발을 하게 하고자 기획하였습니다.

고증(考證)자료에 의하면 다만 고려시대 중기까지는 출사(出仕)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갑신(甲申) 초보 편찬 시(영조 40, 1764년)에 실전계대(失傳繼代)를 연결하기 위하여 교하(交河)종인(宗人)이 자료를 제시하였으나 허황한 이야기(虛荒之說)라 하여 채택하지 않은 사실이 있고 또 그 후 족보 편찬을 5번이나 편찬했지만 그때마다 역시 비조(鼻祖)이하 누대문헌무징(累代文獻無徵) 그대로 적합한 문빙(文憑)을 찾지 못하고 부지기대기명(不知幾代其名)이라며 실전(失傳) 상태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오늘에 우리들이 또다시 살폈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하여 고려태조이래 여말(麗末)까지 단 한명도 왕씨왕조(王氏王朝)에 출사하지 않았겠느냐?’ 의문이 제기됩니다. ‘강남악부(江南樂府)에는 인가(引駕)를 영웅(英雄)으로 표현을 했는데 그 결기로 보아 그 후손이 어찌하여 시골 서생으로만 살아왔겠느냐? 그리고 동주(東柱) 씨 주장처럼 평(平) 씨가 순천의 백운(白雲)산으로 피신(避身)하였다고 순천김(順天金) 이라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확신하다고 유추한다면 그보다 앞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김락(金樂) 김철(金哲) 형제분은 순천(順天)인이라 기록하면서 평 씨의 관향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 그만한 분이면 관을 기록할만하다고 봅니다만~.
즉 順天이라는 지명(地名)은 어차피 고려 충선왕(忠宣王) 2 년(1310)에 처음 생긴 것이니 순천 김 씨라는 말도 그 이후에 생긴 것임에 틀림이 없거늘!’ 일단 의문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다만 평 씨가 순천 김씨라는 가설은 세울 수 있으나 문빙이 더 나올 때까지는 확정하기 어렵지 않는가! 다만. 증빙(證憑)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외의 인물 希哲, 孝德 도 같은 처지라 생각됩니다.

모두 구한말(舊韓末)에 외세(外勢)가 득실거리던 시절이라서인지 답답하던 차에 아마도 교하(校河) 종인이 제시했던 중간계대를 발견하고 각파에서는 신기하게 느껴졌음이라 철원(鐵原)공파를 위시(爲始)하여 모두 그 것을 다급하게 서로가 필사했다고 짐작되는 바입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부분을 각 파마다 각기 보완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합니다. 다만 16세기에 작성했다는 가승(家乘)을 이기(移記)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의문투성이의 불실(不實)한 기록을 종합(綜合)하여 채택해도 무방하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라~. 그래서 우리는 양심상 가정(假定)을 실제(實際)증거(證據)로 받아드리는 그런 대동보(大同譜) 편찬에 동참할 수가 없었음을 양해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1997년 4월26일, 중앙종친회(中央宗親會) 간사장 金浩淵은 느닷없이 대동보출간을 제89회기부터 시작할 것을 제의, 그 후 일부 역원(役員)의 주장으로 정신문화연구원(精神文化硏究院)의 전문위원(專門委員)이었던 동주(東柱) 씨에게 연구(硏究)의뢰하여 종합한 결과 그는 “앞으로 계속 고증을 하겠다.”는 것을 전제(前提)하고는 “현재 나타난 사실만 가지고도 이 가승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바 채택해도 무방하다”는 자신감을 보이자 성급한 이들이 이 결과를 근거로 둔갑시켜 근거(根據)를 찾았다고 결론짓고 비조(鼻祖)휘 총(㹅)과 중시조 휘 윤인(允仁) 그리고 별록(別錄) 중시조 휘 태영(台泳)까지 정상인 것처럼 대수까지 맞춰 연결했습니다. 더구나 돌에 새겨 대전 뿌리공원에 유래탑을 세우고 제막식을 하는 등, 영원(永遠)을 기획하였으니 유감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계대가 맞는다고 하더라도 세대 간을 의미로 26년을 적용하여 시조가 신라 헌안왕(憲安王)시대의 인가별감으로 조작(造作)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산(礪山)군수 고분옹공 노득(孤墳翁公 魯得)의 평양군가찬(平陽君家纂)을 잘못 해석한 데서 유도된 허황된 사조하(思潮下)의 날조(捏造)라 규정하고 저희들은 따를 수가 없음을 선언(宣言)했던 것입니다.

날조라고 규정한 이유는 동주 씨가 전체 이사회(理事會)에서 처음 발표할 때 소위 기몽세계(記夢世系)라 운운하던 것을 아무른 고증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한 세대 간의 연차(年差)를 평균 26년이라는 개인의 생각을 의미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본인은 26년이 될 수 없다는 사회과학적으로 도출한 문헌 중 평균 결혼연령(20.5세)을 중앙종친회장에게 제출(자료집에 상세서술 참고)했지만 일언지하에 각하하고 이후 상담도 없이 본인을 이사직에서 제명하고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집행부에서는 고명(高名)한 한학자(漢學者)이고 전 국사편찬(國史編纂委員)위원이신 용전(龍田) 철희(喆熙) 씨를 찾아 확인을 청(請)하여 애매한 답을 얻는가 하면 또 다른 역사상에 정확하게 나타나는 인물(人物) 휘 평(平) 씨가 김보당(金甫當)의 난(妻父韓彦國과 緣坐)과 관련되어 순천 백운산(白雲山)으로 피신하였다하여 실제 순천김씨 인물로 간주 하고 그의 생졸을 기준한 다음 그보다 상계세대의 연간을 25년, 그 후계 대를 30년으로 하였더니 조금 뭣해서 평균 26년으로 하니 전(鼻祖)과 후(允仁)가 딱 들어맞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의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받아드렸는지? 이 날조된 기준을 버렸는지? 알 수 없으나 종보에 다시 출생시기가 분명한 襄景公과 종손 한철(漢哲)의 출생연도차를 그 현재의 대수(代數) 23으로 나눈 숫자가 26년이라며 이를 황당하게도 중간세대의 각 연간으로 적용하여 마무리를 지었다고 합니다. 마치 그럴듯한 방법이라 생각되지만 이는 양경공 종가(宗家) 주손계대(冑孫繼代)의 흐름을 모르는 실책(失策)이었으니. 또한 날조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경공의 주손가계(冑孫家繼)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주 씨의 노고(勞苦)가 큰 줄 아나 시조가 헌안왕(憲安王)시대의 인가별감으로 확정하고 한세대를 25년으로 가정하는 등의 근본적(根本的)인 척도(尺度)를 잘못 적용(適用)함으로써 아무리 노고가 컸다하더라도 인정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1961년 국민소득 76불에서 그 이전의 교통과 통신이 말로 할 수 없이 불편한 시절인 동시 역시 한자(漢字)가 진서(眞書)였으니 배우기 힘든 시대라 몇몇 지식인(知識人)의 주장(主張)에 모두가 따라 갔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기술(IT)시대가 열렸으니 위작(僞作)과 가작(假作)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것으로 믿습니다.
바른 기록을 찾아 바른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기술로 인한 시대적 문화(文化)적 진화(進化)에 적응(適應)하며 나아가 제2 제3의 알파고(Alpha-Go)에 의뢰하는 한이 있더라도 선조의 빈자리는 정확성을 인정할 근거가 나올 때까지 그대로 남겨두고 성실히 조사 연구에 임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姿勢)요 바른 길(正道)일 것입니다.
다만 시조 휘 총은 후삼국(後三國)시대에의 위인(偉人)라는 가설(假說)을 설정해두는 것을 공개합니다. 자에 전자세계의 서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09. 副委員長 醫學博士 惺雲 斗熙 謹識
大韓民國醫學翰林院 終身會員
前國立慶北大醫大敎授, 및 東國大醫大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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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항에 귀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1. 족보의 연혁
순천김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한 일은 영조 40년 甲申(1764)세보(世譜)이다. 타문(他門) 보다 다소 늦은 것은 절제(節制)공 복관(復官)을 가다린 때문이라 한다. 두 번째는 철종(哲宗) 9년 丁巳(1857)년, 93년만이다., 세 번째는 그 후 70년 만인, 일제강점 17년, 丁卯(1927)년이다. 이때는 대한제국 마지막황제(純宗皇帝)의 붕어(崩御) 후 1년이 지나자 이왕직(李王職)에서 고종황제(高宗皇帝)와 순종황제 실록(實錄)을 편찬(編纂)하는 시기와 같다. 네 번째는 그 후 꼭 30년이 되던 해, 광복(光復)후 11년 丁酉(1957)년이다. 이때는 전후(6.25 戰後)파적 무질서(無秩序)한 시절이다. 해방즉후의 좌우이념(左右理念)의 갈등(葛藤) 속에서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선포(宣布)하였으나 불과 2년 만의 6ㆍ.25 동란(動亂)으로 3년의 전쟁(戰爭)을 겪은 다음이라 나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백성은 거칠고 가난했다. 그래서인지 정묘보와 유사한 족보를 편찬하고 말았다. 그러나 丁卯보에서의 비조(鼻祖) 수단(收單)에 느닷없이 추가(追加) 미화(美化)된 ‘헌안왕(憲安王)시절의 인가별감(引駕別監)’이라는 항목을 丁酉보에서 삭제(削除)하였으니 만분다행(萬分多幸)이라 하겠다. 우선 그 한 건만 보더라도 정유보(丁酉譜)편찬위원들께서는 역사 왜곡(歪曲)을 바로 잡으려고 애쓰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대동보(大同譜)편찬
그리고 다섯 번째는 甲子(1984)년에 편찬을 하며 이전까지의 세보(世譜)형식을 바꿔서 대동보(大同譜)형식으로 기획하였던 것이다. 이 때 본관을 달리 쓰던 족인(昇平 新平 新義 陽澤 등) 들이 모두 순천김씨(順天金氏) 대동보로 합류(合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불참한 종파(宗派)가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긴 하지만 ~ 때는 4ㆍ19와 5ㆍ16의 격동(激動)을 겪으며 겨우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철(鐵)의 군사정권하에 비록 독제(獨制)라고 비난하지만 인구(人口)와 경제(經濟) 기획(企劃) 10년 만에 그리고 또 새마을 운동으로 전환(轉換) 10년 만에 성공적이라 할 수 있던 때라 국민에게는 정신을 되찾는 기회가 주어진 시기였다. 이처럼 우리도 조상을 찾자는 생각이 급하였음인지 3년을 당긴 27년 만에 이뤄졌다.
어쨌든 지난날의 교통과 문화적 미달상태 하에서 족보편찬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근래로 올수록 제 걸음 한 것은 그만큼 삶과 지식의 향상된 활동 덕분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중앙종친회를 창립했다.(1989).

3. 실전상계(失傳上系) 왜곡(歪曲) 과 중앙종친회
갑자(甲子) 대동보 발행한 지 불과 10년 만에 중앙 종친회에서는 느닷없이 그것은 대동보가 아니라 비난하며 새로운 족보편찬을 발의한다. 그 이유는 족보제작 이익금으로 회관건립에 보태자는 것 외에도 장미 빛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절제공의 가훈」액자 그리고 『거칠 것이 없어라(이덕열 소설)』 등으로 호응을 다소 받았으나 그 판매 결산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새 족보 발행은 부당하다는 건의와 항의가 쇄도하자 회장 이외의 임원을 교체하고는 갑자대동보에 불참했던 족인들을 업고 힘을 가하여 맹렬한 활동을 하더니 시조이하 누대문헌무징(累代文獻無徵)으로 중간계대를 메울 공중에 떠있는 가상계대(假像系代)를 삽입하여 비조(鼻祖)까지 이어가겠다고 전재 하였다. 몇몇 종파에서 가졌던 가설(假說)들을 모아 동주(東柱)씨에게 과제(課題)를 주어 종합(綜合)된 결과를 근거(根據)라며 그만 실전세대에 삽입(揷入)하여 상ㆍ하대(上ㆍ下)(代)를 봉합(封合)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4. 이런 왜곡에 대한 반발(反撥)과 양경공파대종회 발족
아! 이처럼 아직도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중간 세계를 이상(異常)하게 날조(捏造)한 가상적인 것을 진실처럼 삽입 연결하였으니 기가 막혔다. 그 동안 그러지 말라고 항의를 하고 건의를 하며 자료도 제공한 바 있으나 모두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집행 이사진에서 반대하는 쪽을 제명하고 진행한 결과였으니! 여기에 불복한 종인들과는 부득이 둘로 갈라놓고 말았다.
그렇게 왜곡(歪曲)한 선조의 세계(世系)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돌에 새기고 비를 세워 먼 훗날의 후손이 믿도록 한다는 각오라 하였다. 무식한 행위에 동참하는 사람의 소행은 참으로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본보기라 할까!. 훗날의 지식인으로서의 후손들에게 오히려 지탄을 받을 것이다. 결국 일부에서는 이를 따를 수가 없다는 종인을 중심으로 양경공파대종회가 발족된 것이다.

5. 역사날조의 예
일제강점기가 그러했다. 강건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기(예 광개토대왕비문)예사이며 구한말에는 민적법(民籍法)을 도입케 하여 이름 없는 자를 적당한 양반 성씨(姓氏)를 지어 등록하게 하여 씨족의 진성(眞性)을 흐렸다. 반면 무식자는 유식한 것처럼 만들었다. 맹호 모양의 한반도 지형이 토기 같다고 하여 약체라는 인식을 심었고 우리 민족을 깨우치지 못하고 뒤처졌다고 엽전(葉錢)으로 비하하는 별명을 만들어 유포하며 약소민족임을 자처하는 교육을 했다. 이런 수법이 도처에 물들어있다. 한 예로 천경자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가짜 미인도가 심사위원들에 의해서 진짜가 되고 본인이 진짜라고 한 미인도를 가짜로 만든 것과 같다. 그래서 천화백은 절필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보도를 들었다. 무엇이 다른가?

6.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된 날조역사
이처럼 못난이가 만들어 놓은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은 오늘에 모든 것이 밝혀져 왜곡한 자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꼴을 본다. 즉 율곡의 10만 양병 권유를 무시한 어리석은 선조(宣祖)와 유사하게도 6ㆍ25직전의 대한민국의 군사적 방어전략을 포함한 미 군사전략의 이면(裏面)을 담은 '웨드마이어의 보고서(Wedemeyer reports!)를 무시한 트루먼 (Harry S. Truman)의 어리석은 정책이 들어났다. 마찬가지로 한 족친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의 선조의 정신을 허구로 몰아 흐리게 한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 무엇 때문에 왜곡을 하면서까지 빈자리를 메우려는지! 글쎄 혹 영웅 심리인지?. 왕족의 후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이미 낮은 출신 성분을 강하게 하고자 함일까? 글쎄 따지고 보면 왕족(王族)이라 하여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권력(權力)을 잡기 위해서는 형제(兄弟)끼리도 살육(殺戮)을 서슴지 않는다. 참으로 허허롭다. 더 이상 평하지 않겠다. 아마도 언젠가는 .그만한 응징을 받을 것이다.

7. IT시대에 적응
현재의 기술(技術)에 따라가지 못하면 영원히 뒤처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가미되는 제4의 산업혁명시기에 이르면 오늘에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사업들이 무용지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과학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根本)이 바르면 그러한 우려(憂慮)에도 안심(安心)하게 될 것이며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다짐해 봅니다.

8. 순김(順金)의 인구(人口)
현제 우리 족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2000년의 국세조사에서 52.258명으로 나타났다. 본관별 인구수로는 133번째다. 그리고 1985년의 52,528보다 오히려 270명이 줄었다. 어찌된 셈일까. 불과 15년 상간이데! 물론 조사방법의 오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요즘의 일반사회의 풍조(風潮)로 볼 때 아마도 사망(死亡)은 많고 출생(出生)은 감소(減少)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문화인(文化人)의 욕구(欲求)일지 모르나 그런 문화생활은 우리 씨족의 방향이 아니기에 동화(同化)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글쎄 강건(康健)한 유전자(遺傳子)를 타고난 씨족(氏族)이 감소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9. 전자세계의 필요성
족보는 혈연(血緣)의 계통도(系統圖)이며 한 가문(家門)의 역사다. 훌륭한 선조(先祖)의 본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식하며 범절(凡節)을 우려내는 기본교재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우리 순천김씨는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에 따르면 유구한 신라김씨를 근원으로 한 관향(羅裔貫設) 81中 제14 벌족(閥族)이다.
오늘의 족보편찬의 주목적은 군권(軍權)시대와는 달리 순수한 근원적(根源的) 연고(緣故)를 찾고 나아가 미래의 성취를 꿈꾸는 보조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의 품격(品格)형성에는 혈통(유전)이 절대적이라 하지만 성장환경(敎育)이 그에 못지않다. 따라서 족보의 진실한 기록은 그만큼 내력(來歷)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한 씨족의 속성을 언제 어디서나 원할 때 즉시에 잦아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10. 선조의 여로(旅路)에 분출(噴出)된 과제
시조할아버지의 정의로운 유전자를 받았기에 절대로 불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과제를 던진다.
어찌하여 우리 선조는 고려의 王氏 王朝 400년 동안 결사(決死) 동조(同調)하지 않았을까? 깊이 있게 연구해볼 일이다. 아직도 그런 의문을 문빙 부족으로 확실하게 풀지 못하고 짐작되는 역사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래도 보다 정확한 길을 찾으려고 애쓰며 『갑오보』를 탄생시켰다. 혹 파벌을 조성한다고 원망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러하지 않다. 역시 바야흐로 IT시대에 들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바른 생각을 가진 후손에 의하여 바로 잡게 될 것을 믿으며 길을 열고자 한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불행(不幸)하게도 시조이후 여말의 중시조(中始祖) 휘 윤인(允仁)까지의 가계가 실전되어 슬프다. 그동안 평민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다만 관직(官職)으로 남은 문빙에 따르면 고려 475년사에는 본관이 순천인 인물로는 확신하고싶은 기록은 고려(高麗)개국공신(開國功臣)에 김락(金樂) 김철(金哲) 형제(兄弟)가 있었고 김락(金樂) 좌상(左相)까지 이르렀지만 金樂 金哲 兄弟는 언젠가 각각 당악김씨(唐樂金氏)와 중화김씨(中和金氏)로 분관(分貫)되었다. 그리고 여말(麗末)에 와서 전객시령(典客寺令, 충열왕 24년.1298에 禮賓省을 고쳐부름) 휘 윤인 이후 휘 형(泂,), 휘 유정(惟精,) 휘 을재(乙財) 휘 을보(乙寶) 형제 등 4代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왜 그러했을까?

11. 실전세계(失傳世系)연구(硏究)
중간에 실전된 성씨가 많다. 우리 순김(順金)도 그 한 예일 뿐이다. 우리 순김(順金)은 250년전 甲申 초보(初譜, 英祖40년, 1764)부터 제5차나 수보(修補)하면서 시조 휘(諱) 총(揔) 이후 고려 말(麗末)의 전객시령(典客寺令) 휘 允仁까지 내려온 누대의 문헌무징(累代文獻無徵)으로 대를 잇지 못하고 失傳이라 전해오고 있다. 헌데 갑신 초보편찬부터 오늘날가지 그 실기(實記)를 찾기 위한 연구흔적(痕迹)이 있으나 모두 사적(私的) 억측(臆測)으로 상계(上系)를 왜곡(歪曲)하는 일만 남기며 또 다른 억측을 남긴다.
따라서 진정 찾지 못할 경우 가장 근사한 학설로 봉합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것은 인륜(人倫)상 참으로 위험(危險)한 일이다. 그래도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객관적(客觀的)인 사회과학적분석(社會科學的分析)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유사(有史)이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1970년에 실시한 대대적인 사회과학적 후향성국세조사(後向性國勢調査)에 비춰보기를 추천한다. 그것은 문헌무징의 고려시대의 남녀 결혼 연령으로 세대간(世代間) 연차를 추측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비조 휘 총의 활동시대가 후백제(後百濟)의 후기(後期)로 닿아 『승람(勝覽)』의 기록과 일치함을 추산할 수 있었다. 허나 아직은 추정에 불과함으로 채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징(文徵)이 더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정보기술시대가 된 즈음 문빙(文憑) 실기검색을 계속할 여지가 있으니 부푼 희망을 가지고 (대보사(大譜社))에 전자세계 보소(譜所)를 차리고 노력하되 한 단순한 생각으로 어떤 결과물로 봉합하지 말 것이다. 결국 못 찾는다하더라도 모르는 것이 정답이다. 모른다고 억지로 조작할 일이 아니다. 관심(觀心)이 있는 선조들이 남긴 고심(苦心)한 흔적(痕迹)이라 하여 부정확한 추정기록을 실전상계의 공백(空白)을 충당하는 것은 자손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다만 역사적(歷史的) 척도(尺度)는 우선 사가(史家)에게 인정받는 사서(史書)에 등재된 선조(先祖)중심으로 그에 부합되는 기록을 존중하며 자손록(子孫錄)을 수섭(收攝)하는 데 노력할 것이다.

12. 비조(鼻祖)의 사록(史錄)과 그 후손(後孫)의 고려(高麗)에 불출사(不出仕)
비조 휘 총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揔仕甄萱官至引駕別監 死爲府城隍神)” 뚜렷이 등재되었다. 해석하면 ‘총은 벼슬이 견훤(후백제)의 인가별감이었는데 죽어서는 순천부의 성황신으로 삼았다’이다,『승평지(昇平誌)』초간에도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부사(府使)는 그대로 채록(採錄)했다. 한편 보학의 권위지(權威誌)인『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正祖時 李萬運)』는 “本新羅宗姓弓裔時爲引駕別監移籍順天封平陽府院君死爲本府城隍神”이라 기록했다.‘국역하면 본래 신라종성으로 궁예 시에 인가별감이었는데 순천으로 적을 옮겼노라 평양부원군에 봉하였으며 죽어서는 순천부의 성황신이 되었다.’라고 해석된다. 다소 조작흔적이 있어 혼란스럽기는 하나 다른 문헌들이 있지만 대개 이 두 가지 문헌으로 귀결(歸結)함을 볼 때 결과적으로 공(公)의 말년이 후백제(後百濟)인물(人物)로 기록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유학자인 송우암(巨儒 宋尤庵)은 북저(北渚)공 비문을 찬(撰)하면서 후백제인물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시절 조현범(趙顯範)이 서(序)한 강남악부(江南樂府, 1784)에는 승평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김별가(金別駕)를 이 지역의 영웅(英雄)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묘보(제3차, 1927)의 시조(始祖)수단(收單)에 느닷없이 ‘新羅憲安王時 引駕別監(신라헌안왕시 인가별감)’이라 추가했다. 이상하게 여겼더니 丁酉譜(제4차, 1957)에는 이문구가 삭제되었기에 매우 다행한 일이라 여겼다.
따라서 더 以上의 권위 있는 서적이 없는 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을 중심으로 정사(正史)와 일치되는 보학책(正史一致譜冊)이 되어야한다.

13. 추구(追究)에 협조
그럴수록 오늘의 우리들의 마음은 다급해 지기도 한다. 먼 훗날 쓸모없는 일이 될 지라도 이런 의문(疑問)을 풀기위하여 또 정당성(正當性)을 위하여 한건(件) 한건의 기록을 중시하고 모으고 또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覺悟)로 전자세계를 시도하였다.
비조(鼻祖)의 정의로운 의협심(義俠心)의 유전자(遺傳子)를 이어받은 모든 종친(宗親)은 적극협조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는다.
물론 기초(基礎)는 갑오보(甲午譜)로 하여 현재(現在)를 있는 그대로 믿고 바로 잡고 영광(榮光)의 미래(未來)를 형성하기 위하여 한발 한발을 내디딜 것이다.

14. 자신이 유전체해독 및 분석체험을 세계최초 시도
유전체분석 전문 기업 (주)이원다이애그노믹스 게놈센타(EDGC)와 비전 컨설팅 전문 교육 기업인 (주)모해컴퍼니는 전장 유전체 분석 체험 청소년 캠프인 'BIO ME Camp'를 16일부터 개최한다. 전장유전체분석(Whole Genome Sequencing; WGS)은 한 종의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DNA 염기들의 전체를 분석하는 것을 뜻한다.
이번 캠프는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청소년 바이오 캠프로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주제 아래 자신의 유전체를 해독 및 분석해 봄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설계해보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15. 부득이(不得已)한 개입(介入)
오랫동안 내력에 관심(觀心)을 쏟은 바는 있으나 모든 것이 부족한 비족(鄙族)들이 본(本) 전자세계구축에 참여하게 된 기쁜 마음을 이 서문(序文)으로 대신하며 이해(理解)와 편달(鞭撻)을 바라마지않습니다.
아울러 편찬(編纂)위원장의 책임을 쾌히 맡아주신 족형 원걸 (族兄 沅杰)님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족숙 동훈(東壎) 재종 喆熙(전양경공파대종회장) 제씨(諸氏) 그리고 본 전자세계를 이끌어갈 심사위원 가연(嘉淵) 격진(格鎭) 두원(斗遠) 동식(東植) 인섭(麟燮) 용희(龍熙) 오현(五絃) 한철(漢哲)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2016年 6月
編纂副委員長 襄景公 二十一世孫 醫學博士 斗熙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