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저공 휘 류 존영(北渚公 諱 瑬 尊影)종택 소장 영정 |
북저공[1571년(선조4)-1648년(인조26)]의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 인조반정 1등 공신… 대제학 지내 `문무겸전` 무인기골(武人氣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실제로 실록(實錄)에 보면 ‘성품이 강건하고 악을 미워했다’고 되어 있다. 北渚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과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내린 객관적 평이다.
김여물(金汝岉)의 아들로 충절(忠節)의 피를 타고난 셈이나 22, 23세 때 父親과 母親喪을 잇달아 치르는 悲運을 떨치고 26세에(선조29년·1596년, 임진왜란 중 丁酉,1597 재란 전)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나이는 53세였다. 1623년 3월 12일 아들 김경징(金慶徵) 및 신경유(申景裕), 조흡(趙潝), 이성연(李聖淵) 등과 함께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대궐(大闕)로 들어간 것이 反正의 대미(大尾)였다. 반정 이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는 그의 손에서 정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정 직후 그는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맡았고 그해 겨울 정사공신1등에다 승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졸기(卒記)를 약기(略記)하면 《말년에 득병하여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왕에게 지극한 충절의 차자(箚子)를 보냈는데 왕의 응답을 가지고 승지로 하여금 문병을 하게 하였으나 이미 말문을 닫으니 향년 78세다. 김류는 근엄(謹嚴)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器局)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癸亥(1623)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판서로서 문형을 맡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추숭(追崇)과 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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