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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김씨 김종서 후손들
작성자 : 김정수 작성일 : 2018-10-21 21:49:04       조회수 : 2203 첨부파일 :

옮겨 오는글입니다.|일반 게시판

대구_청곡 | | 조회 10 |추천 0 | 2018.10.20. 13:23 http://cafe.daum.net/gooseong1949/TUi3/58 

순천 김씨 김종서 후손들
 정통국사  ・  2018. 3. 2.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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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서 - 장남 김승규 (金承珪) - 김만동, 김수동 (金萬同, 壽同) - 無後    김조동 (金祖同) - 無後   김행남 (金幸南)

              차남 김승벽 (金承璧) - 김중남 (金仲男) 김차동 (金次同) - 無後    김팽 (金澎)  

                                               김사동 (金四同) - 無後                       김석동 (金石同)             

               3남 김승류 (金承琉) - 김효달 (金孝達)    

               서자 김석대 (金石臺) , 김목대 (金木臺) - 無後

cf. 김승규의 아들 김수동과 김조동, 김종서의 서자 김목대 등은 대간의 간언 및 대신들의 의논에 의하여 1454년 8월 15일 이후 처형됨  참고로 김승규 子 수동과 김승벽 子 석동은 순천김씨대동보에 나오지 않음 (김석동은 1454년 16세가 되면 전라도 극변의 관노로 영속하라는 전교가 있었음) cf2. 김승벽은 계유정난 직후인 1453년 10월 12일, 충청도 청주·공주·전의 등지로 도주, 같은 시기 김석대 또한 충주로 도주했다고 함. 이때 百戶를 보내어 추적하되 죄인의 아들과 사위를 모두 붙잡는 즉시 안치토록 전교 내림.   나흘 후인

 10월 16일, 김승벽이 수원 광덕(廣德)의 윤덕산(尹德山)의 집 또는 전의 이로(李老)의 집, 공주의 농장 등지에 있다는 제보가 들어옴   이후 11월 1일에 수양대군과 좌의정 정인지 등이 `안치한 사람은 이미 너그러운 법에 따라 처분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 김종서는 首惡이므로 김종서가 병사를 일으키려 했다면 아들 김승벽이 반드시 좇았을 것이라며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우의정 한확과 좌참찬 이계린의 의견이 있었음. 10월 16일 ~ 11월 1일 사이에 체포되어 1일 이후 처형된 듯.cf3. 11월 23일, 김승벽과 김석대의 아들로 나이 16세 이상된 자는 거제·남해·진도·제주 등의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키고, 15세 이하는 그 어미에게 주어 기르게 하여, 장정이 된 뒤에 관노에 속하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음cf4. 김승규는 계유정난 당일에 아버지 김종서와 함께 사망함.   10월 13일, 주형(誅刑)을 받은 김종서와 김승규의 아비와 자식으로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영원히 변군 관노(官奴)에 붙이고, 나이 15세 이하인 자 및 모녀·처첩·조손·형제·자매 또는 자식의 처첩은 영구히 외방 관노에 붙이고, 백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외방에 안치하라는 전교가 있었음   11월 11일, 김종서와 김승규의 친자(親子)로서 나이 16세 이상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15세 이하는 어미를 따라 자라게 하여 성년[成丁]이 된 뒤에 거제(巨濟)·제주(濟州)·남해(南海)·진도(珍島)의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키고, 그 참형과 교형에 처한 사람들에 연좌(緣坐)된 사람 가운데서 남부(男夫)는 나이 80세와 독질자(篤疾者), 부인(婦人)은 나이 60세와 폐질자(廢疾者)는 연좌를 면(免)하게 하고, 딸로서 혼인을 허락하여 이미 그 남편에게 돌아가기로 정해졌거나, 양자(養子)를 한 자 및 약혼(約婚)을 하고 아직 성혼(成婚)하지 않은 자는 추좌(追坐)하지 말며, 또 동거(同居)하는 자가 아니면 그 재산(財産)을 관에 몰입하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음* 장릉 배식단에는 김승규, 김승벽, 김목대 (실록에는 金金木壹 이라고 오기되어있음) , 김조동, 김수동 등 5人이 배향되어 있음* 김승벽 (金承璧) - 김중남 (金仲男) - 김정 (金鼎) - 김광박 (金光博) - 김성갑 (金誠甲) : 1610 (광해군 2) 식년 문과 병과 23위, 이후 사헌부감찰, 강계판관, 평안도도사 등 지냄 * 김승규 (金承珪) - 김행남 (金幸南) - 김도 (金燾) - 김식 (金湜) - 김세충 (金世忠) - 김수언 (金秀彦) :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장인, 딸 1906년 (광무 10) 금암동 효열 순천김씨 정려** 김수언 (金秀彦) - 김치림 (金致霖) - 김기 (金機) - 김익량 (金翼亮) :  1719 장녕전참봉1722 군자감봉사  1726 순릉봉사 (또는 참봉)이하 참조
영조실록 10권, 영조 2년 8월 6일 을축 2번째기사 1726년 청 옹정(雍正) 4년
좌의정 홍치중이 김익량은 김종서의 자손이 분명함을 아뢰다
임금이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이 이구(李絿)와 신사원(申思遠)의 효행을 정표(旌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에게 증직(贈職)하도록 하였다. 이구는 이만성(李晩成)의 아들이고 신사원은 신임(申銋)의 아들이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김익량(金翼亮)의 일은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양가(兩家)의 말을 들어보건대, 김익량은 김종서(金宗瑞)의 자손임이 분명했습니다. 송시열의 5대 조부가 김종서의 질녀서(姪女壻)로 그때 3세의 아이를 숨겨주어 김종서의 뒤가 보존되게 했었는데, 곧 김익량의 선조(先祖)이었습니다. 송시열의 가문에서 당초에 기휘(忌諱)하면서 감히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드디어 김종서는 후손이 없다는 말이 있게 되어, 접때의 대관(臺官)의 상소에 곧장 ‘김종서는 후손이 없는데 김익량이 사칭(詐稱)한 것이라.’고 하게된 것입니다. 어찌 세속에 떠다니는 말 때문에 두 선정의 가문에 전해 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대신의 말을 들어보니, 비로소 석연(釋然)해진다."하였다.
[출처] 순천 김씨 김종서 후손들|작성자 정통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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