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홍씨 시조 홍지경의 비 순천김씨 |
작성자 : 김정수 |
작성일 : 2019-03-26 11:06:33 조회수 : 1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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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풍산홍씨 시조 홍지경(洪之慶 國學 直學公)
公의 姓은 洪이요 諱는 之慶인데 字와 號와 生.卒은 전하지 않는다.
始祖 國學 直學公 께서는 高麗 高宗 29년(서기 1242)에 文科(지금의 행정고등고시)에 壯元及第(수석 합격)하시어 벼슬이 國學 直學(조선시대의 成均館, 지금의 서울대학교 교수)을 역임하셨다.墓所는 安東郡 豊川面 申城洞 午山 堂龍의 乾坐이다.
配 順天 金氏 始祖妣 順天金氏의 墓所는 直學公 墓所가 있는 山麓 아래의 亥坐이다. 1746년(조선 영조22)에 直學公의 墓所와 함께 墓碑를 세웠으나 舊碑가 파손되어 1981년에 改竪(개수)하였다.
始祖의 諱는 之慶이라 하셨으니 高麗 高宗 二十九年 壬寅에 道試에서 拔濯(발탁) 추천되어 文科 會試에 장원으로 合格하셨으며 그것은 宋나라 浮祐 二年의 일이었다. 벼슬은 國學 直學에 이르셨고 夫人은 順天 金氏로서 二男을 두셨는데 長男은 都僉讚 舍人 벼슬을 하신 侃(간)이시니 文章으로 그 名聲을 世上에 떨치셨고 號를 洪崖(홍애)라고 하셨으며. 次男은 樞密使 벼슬을 하신 備(비)이시다. 舍人公께서는 密直使 三館 大提學의 벼슬을 하신 侑를 낳으셨고 密直使公은 寶文閣 大提學 벼슬을 지내신 演을 낳으셨는데 代代로 安東의 豐山縣 豐南面 申城浦라는 마을에 사셨으며 이 고장에 장례를 지내신 것이었다. 寶文關 大提學公께서 領郎將 벼슬을 하신 龜를 낳으셨으니 高湯에 옮겨 사시면서 高麗末에 벼슬을 사양하셨다. 五代孫되시는 大司憲 履祥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으니 東方의 名望 있는 家門이 되었다. 崇禎 己巳에 大司憲의 아드님이신 霶께서 嶺南의 監司로 계실 때에 四世의 분묘를 돌아 보시고 拜禮하신 후에 修治하시고 碑石을 세우셨더니 그 후 여러 차례 兵亂을 겪으면서 子孫들은 먼 고강에 흩어져 살게 되였기 때문에 묘소는 그 고장 사람들이 몰래 차지한 바 되었다. 그 후 己丑年間에 後孫되시는 萬朝께서 嶺南에 監司로 가시게 되어 先塋을 찾으려고 하셨으나 단지 寶文閣 大提學公의 묘소만 安東의 屬縣인 臨河面에서 省掃하시고 密直使公 以上의 三代의 묘소는 있는 곳을 상세하게 알수가 없어 臨河面 水谷에 碑를 세워 疑信을 傳하며 壇을 모아 祭祀하셨다 英宗 丙寅년에 지시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後孫이신 重默 吉輔 山輔 세 분께서 申城浦에 가셔서 碑石 깨진 조각과 誌石의 조각을 午山의 작은 언덕에서 發見하시고 거기에 새겨진 方向대로 壙面을 현재의 묘소에서 열어 헤치고 살펴보시매 乾坐는 시조의 묘이고 그 아래 戌坐는 密直便公의 묘이며 또 그 밑에 亥坐는 順天 金氏의 묘이며 거기서 東便으로 聖造洲辰坐는 洪崖公의 묘소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에 封塋을 改築하고 碑石을 세우며 祭田을 두어 歲一祭를 行하였다. 始祖의 묘소를 改封할 적에 밤을 지내고 아침에 살펴보니 壙中에 흙이 가득차 오르며 이슬이 구슬같이 어려 있었고 흙을 덮을 때에는 소낙비가 쏟아지고 壙의 왼쪽으로 무지개가 뻗쳐서 근방을 들렸다가 오랜 뒤에 사라졌으니 이것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하게 여겼다. 아아! 姓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始祖가 있는데 거의 다 始祖들의 종적이 묘연하여 근원을 알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시조께서는 높은 벼슬을 지내셨으며 또 洪崖公이 그 아드님이 되시고 孫子와 曾孫이 모두 館閣의 大提學을 이어서 지내시어 당시에도 名望이 있는 家門이었으나 先系를 알수 없게 된 것은 미루어 생각하건대 國朝가 변친됨에 즈음하여 譜牒을 失博한 까닦이 아니겠는가? 安東 사람들이 或은 말하기를. 國學公 以上의 묘소는 어느곳. 어느 곳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으매 後孫들은 한탄함을 마지 않을 뿐이다. 삼가 瑩域이 失博되었다가 찾은 사연을 적어 옛 墓誌와 함께 墓 왼쪽에 묻어 百世後까지 우리 始祖의 墓인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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